동탄드림 게시판

나무와 창조자

일상나눔
작성자
wave
작성일
2023-09-24 23:17
조회
389
어디가서 신앙인이라 내뱉고는 있지만
나 스스로 믿음의 분량과 정도를 자신하기 힘들다

자기 눈에는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제잘난 인간
하지만 창조자의 눈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 같은 존재
나약하고 나약하다 매일매일 흔들린다

어느 날은 잠을 자기 전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과연 그럴 듯한 하루였는가?
피곤한 몸을 녹여오는 침대의 달콤함 사이로
후회와 찝찝함이 뒷목을 타고 올라온다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쉬고 잠을 청한다
완벽한 하루는 없다

겨울을 좋아하는 나는
마치 들개처럼 배회하는 것도 좋아하여
집 앞 개천가를 끊임없이 걷고는 한다
눈이 많이 쌓인 어느 날
밤 10시~11시 사이가 되면 사람은 한명도 없고
마치 하얀 양탄자를 깔아놓은듯
절대 고요 속에서 백설의 길이 펼쳐질 때가 있다
드문드문 가로등의 인사를 받으며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을 걷고 있으면
그냥 이대로 끝까지 가고 싶어진다
끝도 없는 그 끝

겨울에 개천을 걷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보는 것이란
절반은 얼어붙은 물줄기와 자갈,
허리즈음 자란 황매화나 화살나무 혹은 커다란 나무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겨울에 모두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
무채색에 가까운 움츠림을 드러낸다
머플러 속에 목을 잔뜩 파묻은 나도 움츠러든다
그러면 주변을 자세히 감상할 수 없고
자꾸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오래 걷다보니
어느 날부터 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새하얀 눈을 머리에 얹고서
앙상한 가지로 영하의 온도를 버텨낸다
녀석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서 움츠리지도 못한다
눈이 오면 오는대로
비가 오면 오는대로
태양이 뜨면 내리쬐는대로
태풍이 오면 바람부는대로
그냥 온전하게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 불쌍하다고만 볼 이유는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맨 몸으로 버텨낼 수 없는 수 많은 환경을
녀석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 몸으로 견디어낸다
내가 가장 의아한 것은
영하 20도의 날씨에도 멀쩡하게 버텨서
그 다음해에 보란듯 잎을 내는 오묘함이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 치고
영하의 날씨를 헐벗은 몸으로 3개월간 버티어내는 것이 있던가
두꺼운 털을 뒤집어쓴 북극곰이면 가능한가
아니면 가죽이 두꺼운 순록이나 바다코끼리면 가능한가
아무리 그들이라도 3개월간 부동자세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영하의 날씨에 고개를 쳐들고 버티어 서는 것은 불가능이다
물론 뭐…. 곰벌레인가…. 그것은 우주에서도 산다고 하지만…..
녀석도 무언가는 먹어야 하겠지…..

하지만 나무라는 녀석은 가능하다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수분을 빼내고
건조한 미라의 상태가 되어 일정기간 잠을 잔다
그리고 봄이 오면 눈을 뜨고 다시 수분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돌과 금속같은 광물이나 무기물이 아니다
확실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어느 날은 세상의 일 때문에 마음들뜸이 있어
기분이 좋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고
또 어느 날은 내 속의 감정 때문에 갈등이 있어
기분이 안좋은 상태로 집으로 오기도 한다
그러면 나의 기분 상태에 따라서
집안에서의 언성과 분위기가 좌우된다

그러한 나의 기분 상태라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확실한 회사의 업무
시시각각 사건을 만들어내는 가족친지의 일들
건강의 문제와 정신상태의 괴로움에 기인하기도 한다
또한
운전을 하고 오는 길에 누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든지
마트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앞사람이 오래 헤맨다든지
혹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맨 꼭대기에서 내려오지도 않는
그러한 헤프닝들도 다수이다

뜨거움과 차가움
높음과 낮음
미련함과 현명함
인내와 방종
천박함과 예의
그 사이에서 매일매일 진동하고 갈등한다
그 진동이 너무 심하여 이제는 손떨림까지 생긴다

봄이 되어 그 나무를 찾아가본다
그러면 그 녀석은 보란듯
정말로 한치의 거짓도 없이 보란듯!
아주 작은 이파리들을 내어놓고
나에게 자랑한다

“이봐, 겨우내 내가 죽은 줄 알았지?
이래봬도 내가 좀 단단해
그깟 겨울 영하온도로 여간해서는 죽지 않아
그러니 걱정마
겉보기에는 거칠고 멋없에 생겼어도
생명력 하나는 끝내준다구!”

가벼운 환절기와 온도변화에도
목감기와 몸살에 몸부림치는 나는
그 나무를 보며 숙연해지고는 한다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추우면 춥다고 난리를 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내야하는 나
나무에 비하면 나는 정말로 나약한 존재인듯 하다

몇 년간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어느 덧 그 나무도 예전보다 많이 자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년 반복되는 날씨의 변화에
그 녀석은 아무런 옷과 우산도 없이
그냥 벗은 몸으로 그냥 가만히
너무도 고요하게 가만히 인내하고 버티어 낸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자랐던 것이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이가 자라고
가족들이 나이를 먹어가고
몸이 아파오고
신상의 변화가 생겨서
마음이 이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는 동안

나무라는 녀석은
거칠고 멋없는 피부를 고스란히 간직한채
봄이 되면 작은 아기같은 싹들을 틔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새생명의 신기함과
녹음의 편안함을 선사한다
여름이 되면 불같은 태양을 받아 그 아래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안으로 모여들게 하고
새들이 집을 짓도록 배려 하고
맑은 공기를 만들어낸다
가을이 되면 붉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배고픈 생명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자신은 기꺼이 잎을 떨구어 빈손이 된다
겨울이 되면
겉멋을 완전히 포기한채
볼품없는 미라가 되어 다음 봄의 약속을 희망한다
그리고는 또 다시 부활한다

예전에는 미처 그러한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 누군가 창조의 증거를 물어볼 때
나는 서슴없이 나무를 이야기하고는 한다

물론 그것을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
세상의 기원을 과학자는 결코 풀어내지 못했으니
서로 싸울 일은 없는 것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에 그 무엇하나
사람이 돌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방치해두었을 때
자기 스스로 혹독한 환경을 완벽하게 견디어내고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에게 오로지 도움만 주면서도
그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고 방해도 되지 않는 존재
그러한 것이 있던가

깊은 뿌리로 홍수를 막고
풍성한 잎으로 비와 태양과 바람을 막고
찬란한 열매로 세상의 생명을 먹여살리고
산소를 내뿜어 그 누구든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자신의 몸은 수백년을 버티는 건축재료로 내어주며
기어코 밑둥까지도 행인들이 걸터앉을 자리로 허락하는
완벽한 이타의 상징
그러한 것이 있었던가

요즘에는 산책을 하다가
개천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수피를 만져보고는 한다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다
아….. 그런데 돌연 생각난다….
오래전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손길이 그러하였다
인생의 풍파와 고생으로 여기저기 갈라진 손의 표면
그러나 그 손의 안쪽은 얼마나 따뜻하였던가!
나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는 그 투박하고 볼품없는 손의 온기
자신이 먹지 않아도 손자가 먹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던 표정
왜 그 때에는 그것을 몰랐는가

나는 나무 곁으로 다가가
그 고요한 침묵의 기립을 음미한다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지만
세상 유혹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갈길 못찾아 위아래로 헤맨 나의 마음을
기어코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옆에서 보아도 그 나무는 거기에 있고
뒤어서 보아도 그 나무는 거기에 있다
어제 봤을 때에도 거기에 있었고
내일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흔들리고 갈팡질팡하는 내가
만약 그 나무를 볼 수 없다면
나는 기준을 잃어버리고
마치
좌표의 원점이 없는 우주에서 미아가 되듯
어디론가 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나무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위아래로 요동치고
좌우로 흔들렸다가
앞뒤로 주춤주춤 하는
불안정한 나에게
부표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나는 나무를 보면
이 세상에 창조자가 있다고 여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오로지 나 혼자 살겠다고
세상 모든 물질을 두 손 가득 움켜쥔채
타인의 불행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와는 달리

그와 정반대의 희생을 행사하면서도
진정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미련하고 멍청하면서도 비합리적인 그 나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의 결정체가 아닌가

이제는 듣고싶다
도대체 너는 누가 왜 만들었던가….

——————————-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96:12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예레미야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다니엘 4:10-12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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